피아니스트 김선욱과 해석의 문제(2): 연합뉴스의 독주회 비평에 부쳐 음악

피아니스트 김선욱씨가 며칠 전 서울에서 베토벤 소나타 8, 14, 23번을 연주했다. 이 독주회에 대한 비평가 최은규씨가 연합뉴스에 발표한 비평이 논란이 좀 되는 모양이다. 생산적인 논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한국에 살지 않으니 물론 이번 연주를 듣지 못했으며, 이 글은 당연히 최은규씨의 연주비평에 대한 반론이 아니다. 김선욱씨의 베토벤 연주에 대한 나의 가치판단을 보여주는 글도 아니다. 다만 최은규씨의 연주비평에 깔린 몇 가지 전제들을 비판적으로 짚어보고자 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김선욱은 최근 언론 인터뷰를 통해 베토벤 소나타의 표제를 배제하고 절대음악의 견지에서 작품에 접근하겠다고 선언을 했는데(이 블로그의 이전 글 참조), 최은규는 여전히 작품의 표제를 해석의 준거로 제시하는 듯하다. 김선욱의 입장이 당연히 옳으며, 쓸데없이 표제를 끌고들어온 것이 최은규의 패착이다. 표제에 의존하지 않고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였는데, 김선욱이 불과 며칠 전에 표제음악적 접근을 드러내놓고 논파한 시점에서 굳이 표제를 건드린 것은 비평가로서 실망스러운 모습이다. 김선욱은 자신이 곡의 별명에 현혹되지 않았다는 말로 간단하게 최은규의 비판을 기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절대음악과 표제음악의 대립, 전문적인 연주자와 통속적인 비평가의 대립으로 단순히 끝낼 게 아니다. 내 생각에 진짜 쟁점은 베토벤 해석에 있다.

연합뉴스 기사를 보고 뭔가 짚이는 게 있어서 아르투어 슈나벨(Artur Schnabel, 1882-1951)의 연주(14번, 8번)를 들어보았다. 최은규의 비판 중 몇 가지는 슈나벨의 연주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런데 슈나벨은 베토벤 연주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가 아닌가? 슈나벨의 연주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19세기 사람들 연주는 원래 자의적이고...하는 틀에 박힌 설명은 일단 배제하자. 최은규가 김선욱의 연주에서, 내가 슈나벨의 연주에서 주목한 문제는 다음 두 가지다. 첫째, 프레이징을 가능한 한 길고 고르게 연장하는 문제, 둘째, 소나타 형식에서 발전부 말미의 처리 문제.

1) 소나타 14번(월광) 1악장: 프레이징의 연속성

"그가 만들어낸 달빛은 지속적으로 호수를 비추지 않고 비추었다 말았다 하며 깜박이는 듯했는데, 이는 한 마디를 단위로 약간의 휴지부를 두며 프레이징(악상을 구분해 정리하는 것)을 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음악의 호흡은 매우 짧게 느껴졌고, 호수의 물결을 나타내는 듯한 8분음표의 지속적인 흐름이 뚝뚝 끊겨서 이 음악이 담고 있는 온화하고 따스한 감성을 마음껏 느끼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됐다."(기사 인용)

최은규의 주장은 요컨대 주선율 네 마디를 한 프레이즈로 연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굳이 달빛을 묘사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노래하듯 길게 연결된 프레이징이 19세기 음악의 패러다임 속에서 좋은 연주의 표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음악계에는 긴 성악적 프레이징을 절대적인 덕목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비음악적'이라는 말은 음악전공자들 사이에서 프레이즈가 뚝뚝 끊기는 것을 가리키는 은어로 쓰인다.

쇼팽 소나타 2번의 장송 행진곡에 대해 최은규와 같이 주장했다면 백번 동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길고 고르고 연속적인 프레이징이라는 이상은 클레멘티가 레가토 주법을 확립하고, 벨칸토 오페라가 건반음악의 모델이 된 18세기 후반 이후의 패러다임일 뿐이다. 바흐 시대에만 해도 없었고, 쇤베르크 이후 해체된 이상이다.

'월광' 소나타는 1801년 작품이다. 선율을 전부 길고 부드럽게 연결하는 것은 피아노 음악사에서 베토벤의 과도기적인 성격을 놓치는 것일 수도 있다. 레가토와 논 레가토의 혼재, 동기와 주제선율의 역동적인 관계, 그리고 선율적인 양식과 리듬적인 양식의 긴장, 이처럼 다양한 시대의 요소들이 완벽하게 정제된 형식 속에 통합되는 것을 지겨보는 경이, 이런 것들이 모차르트와 초기 베토벤을 듣는 재미가 아니었던가? 베토벤에게서 긴 주제선율을 하나로 잇는 연속적인 프레이징이 진짜로 중요해진 것은 한참 후기의 일이다(소나타 29번, 교향곡 9번, 현악사중주 15번의 느린악장들). 게다가 1801년에는 피아노의 울림이 오늘날처럼 긴 프레이즈를 가득 채워줄 만큼 풍부한 것도 아니었다. 만일 베토벤 시대의 악기로 최은규가 요구하는 것처럼 친다면 재미없는 음악이 될 것이다. 이 소나타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19세기적 프레이징의 이상을 무비판적으로 적용하기에 앞서, 위와 같은 음악사적인 고려가 필요했던 게 아닐까?

최은규는 "온화하고 따스한 감성"이 소나타 14번 1악장의 본질이고, 그것을 위해서 규칙적인 반주와 호흡이 긴 선율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김선욱의 연주는 이 정답을 맞추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논의의 순서가 뒤집힌 것 같다. 연속적인 프레이징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 곡이 온화하고 따스하다고 느끼는 것이 아닌가? 개인적으로 나는 이 곡이 온화하다고도 따스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으며, 그보다는 끊임없이 어두운 질문을 던지는 곡이라고 믿는다. 결국 연주를 듣지 못한 상태에서 두 사람의 글만 읽고 무모하게 짐작해 보자면, 김선욱은 베토벤을 연속적인 프레이징이라는 19세기의 패러다임에 가두는 데 도전했던 것은 아닐까?

2) 소나타 8번(비창) 1악장: 소나타 형식의 해석

최은규의 문제제기는 김선욱이 연주하는 1악장 느린 부분(Grave)의 주제가 지나치게 느리고 강조되어 있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이게 문제인 이유는 소나타 형식 특유의 균형잡힌 구도를 해치기 때문이다.

"비창의 정서를 강조하고자 하는 그의 의도는 알겠지만, 주제의 지나친 강조로 인해 소나타형식을 갖춘 1악장 주부의 구조와 발전부 말미의 클라이맥스는 전혀 부각되지 않은 채 어정쩡하게 넘어갔다. / 베토벤의 소나타 1악장에 있어 발전부 말미에서 재현부로 넘어가는 부분은 그림이나 건축에 있어 황금분할 지점과 일치할 정도로 대단한 중요성을 지니며 드라마틱한 느낌을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1악장의 소나타형식의 구조를 드러내는 데 소홀한 그의 베토벤 연주에 동의하기가 힘들었다." (기사 인용)

문제의 느린 주제는 도입부, 발전부 앞, 코다 앞에서 세 번에 걸쳐 등장한다. 중요한 지점마다 등장해서 소나타 형식의 자연스러운 전개를 끊어놓는 것이다. 말하자면 소나타 형식의 균형잡힌 구도를 뒤흔들고 있는 것은 김선욱이 아니라 베토벤 자신이 아닌가? 그렇다면 연주자의 임무 역시 통상적인 "소나타형식의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베토벤이 그 소나타 형식을 어떻게 변형시키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최은규는 1악장 주부의 구조를 문제삼고 있는데, 내 생각에는 강력한 도입부의 충격으로 주부의 안정성을 깨고, 특히 제1주제를 매우 휘발적으로 만드는 것이 이 악장의 근본적인 특성인 것 같다(소나타 26번 1악장 참조). 그리고 발전부의 말미를 과연 "클라이맥스"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또한 당연한 것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다. 슈나벨의 해석처럼, 이 부분은 폭발적으로 "부각"하는 대신 번개처럼 사라져버리게 만드는 것이 더 낫지는 않을까? 또한 이 악장에서 발전부 말미의 클라이맥스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던 것은, 다름아닌 제1주제가 곡을 쥐고 흔들만큼 강력한 안정성을 가지고 있지 못해서가 아닐까?

요컨대 베토벤은 소나타 8번에서 매우 치밀하면서도 과감하게 소나타 형식의 통상적인 구도를 흔들고 있다. 그러니 이 곡의 구조를 소나타 형식의 일반적인 특성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베토벤의 소나타 1악장에 있어..."라는 일반론으로 시작하는 최은규의 논의는 아무래도 안이한 셈이다. 소나타 악장에서 발전부 말미를 황금분할 지점에 비유하는 것은 그럴듯한 이야기지만, 베토벤의 진정한 업적은 황금분할이 아니더라도 전개에 따라 전체 구조를 완벽하게 만들 수 있는 분할의 지점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입증한 데 있다. 그의 소나타들은 하나하나가 자기만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8번 1악장의 발전부 말미가 분할의 지점으로서 어떤 성격을 가져야 할지는, 이 곡만의 구조적 특수성을 근거로 밝혀야 하지 않을까? 베토벤 연주에 대한 비평 역시 일반론적 도식을 가지고 연주를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연주자가 어떻게 자기 나름대로 완결된 구조를 만들어내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베토벤 소나타들의 구조가 다양한 만큼, 각 소나타들의 구조를 드러내는 방식 역시 다양하기 때문이다. 연주자 특유의 구조 설계를 충분히 파악한 다음에 비판을 시도하지 않으면, 연주비평은 그저 작품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슈나벨의 발전부 말미는 "클라이맥스는 전혀 부각되지 않은 채 어정쩡하게 넘어"가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집중하지 않으면 놓칠 수 있는 까마득한 심연일 수도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내가 문제삼고자 했던 것은 비평의 내용이 아니라 방법이다. 애호가들 사이에서 검증된 비평가인 최은규씨가 틀렸다거나, 듣지도 못한 김선욱씨의 연주가 옳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피상적인 대립으로 보일 수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 속에 베토벤 텍스트 해석이라는 문제가 걸려있다는 것이다. 비평가들이 더 분발해서 해석에 대한 논쟁이 풍부해지길 빈다.

텍스트 해석은 결코 지엽적이지도, 사소하지도 않다. 순간의 해석이 엇갈리는 지점에 하나의 거대한 세계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술이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자리만큼의 새로운 세계를 가지게 될 것이다. 또 우리는 그 자리를 잊어버리는 만큼 오래된 세계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덧글

  • ㅇㅇ 2017/03/28 21:46 # 삭제 답글

    감사합니다. 많은 공부와 함께 생각을 하는 시간을 갖게 해주셔서요.
    솔직히 말씀 드리면 전 비평을 읽지 않았습니다.
    기자나 비평가나 타이틀을 걸고 대충 파편적인 지식들을 조합해서 글을 버무리지 말고
    읽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강간당하는 기분이 듭니다.
    통합적으로 유기적으로 본질에 대한 사유를 보여주길 바랍니다.
    블로거님 블로그에 오늘 처음 검색해서 들어온 사람인데 글을 읽으니 시원한 기분이 듭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가 정말 알고 싶었던 포인트를 집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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