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사티, 단상 두 개 음악

1905

에릭 사티는 중학생이 될 나이에 신기하게도 파리 음악원에 들어갔지만 전교 꼴찌 근처에 있었던 것 같다. 퇴학과 재입학을 오가다 변변한 이수증 하나 없이 군대로 끌려갔다. 여기서부터 캬바레 반주 등 각종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인디음악가의 삶 시작. 그러다 1905년, 어영부영 39살이 된 사티는 대위법을 배우겠다고 파리의 모 사설 음악원에 등록한다. 사티의 숱한 기행 중의 하나로 회자되지만 이상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게, 삼십대에 기초가 안 되어 허우적거리는 학생은 멀리 갈 것 없이 내 얘기 아닌가.

슈베르트도 죽기 직전에 대위법을 배울 생각을 했었고 브루크너는 삼십대 내내 대위법 레슨을 받았다. 스물다섯 이후에도 시를 쓰고 싶으면 역사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했던가. 서른다섯 이후에도 작곡을 하려면 대위법을 알아야 한다. 역사의식과 마찬가지로 대위법은 개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바그너, 드뷔시, 스크랴빈의 화성은 단번에 누구의 곡인지 알 수 있게 하지만, 대위법은 훈련을 받지 않은 나 같은 경우에는 조스캥과 쇤베르크 사이에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없으며, 작곡가의 개성을 파악하는 데는 '어떤 대위법인가'보다는 '대위법을 얼마나 받아들였는가'가 중요한 것 같다. 대위법은 화성법이 가르치는 것보다 비개성적이고, 따라서 권위적이고 독단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근대음악의 혁신을 이끈 것은 대위법이었다.

나이를 먹는 것은 보통 믿음이 깨져가는 과정으로 묘사되지만 그만큼이나 새로운 믿음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로구나, 내가 세상에 있든 말든 움직일 수 없는 원리가 있구나, 그 원리를 습득하는 것은 내가 누구고 무엇을 원하고 하는 문제와 상관이 없구나, 이런 생각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흔히 구라를 치듯 이상과 현실의 대립이 아니라, 한 믿음을 다른 믿음으로, 혹은 한 현실을 다른 현실로 대체하는 일일 테다. 하여간 선택의 순간은 부지불식간에 온다. 젊은 날의 믿음을 고수한다고 꼰대 되기를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가짜 깨달음으로 기성세대가 된다. 대위법처럼 저항할 수 없이 옳은 것은 대개 없다.

사티가 대위법 수업시간에 제출한 과제물 모음. (2017년 2월 7일)


1913

에릭 사티의 <건조 태아> 3번(1913). 베토벤 패러디로 볼 수 있겠지만 무엇이 누구의 패러디인지 잡아낸다고 곡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작품의 해석이 아니라 해석을 회피하는 지식에 가깝다.

다만 사티는 베토벤의 아픈 데를 건드리고 있다. 곡을 끝낸다는 것이 가능한가? 베토벤의 형식은 모차르트의 소나타와 같이 안정적인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 그의 전개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들을 품고 있으며, 시작과 끝은 대칭을 이루지 않는다. 그 역동적인 작법으로 자연스럽게 곡을 마무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더 이상의 음악이 필요없는 충족의 상태, 혹은 음악을 추진하는 욕망의 소멸에 도달할 수 있는가? 교향곡 5, 6, 8, 9번의 마지막 악장을 들어보자. 아무리 도미솔을 퍼부어도 음악이 끝나야만 하는 어떤 논리적인 지점은 생겨나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장치로 완전한 파국을 불러올 수 있는 문학과는 달리, 너무 멀리 나갔으면 타협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조성음악이다. 베토벤의 마지막 으뜸화음들, 혹은 마지막 종지들은 늘 너무 많으면서도 부족하다.

사티가 베토벤과 의식적으로 대결한다는 말은 아니다. 사티가 제기하는 문제는 자기 자신의 문제인 동시에, 사티와 베토벤만의 것이 아닌 보편적인 문제, 예를 들어 프루스트와 베케트의 문제이기도 하다. 작곡이 음악을 끝낼 수 있는가, 음악은 침묵에 도달할 수 있는가, 끝의 제스처를 반복해도 왜 아무것도 끝나지지 않는가. 베토벤의 또다른 발명품인 여담조의 코다(피아노 소나타 22, 26, 29, 32번 1악장) 역시 곡이 다 만들어져도 음악은 끝나지 않는다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사티와 베토벤은 다 같이 침묵에 도달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사티는 베토벤을 패러디하면서, 음악이 침묵에 도달하지 못하는 광경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침묵은 서로 다른 것이다. 베토벤에게는 돌이킬 수 없음을 무릅쓰고 말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현악사중주 16번) 곡을 끝내기 위한 집요한 노력은 시작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다. 1913년, 후기 사티의 문제는 정반대에 있다. 침묵을 구하는 것은 애초에 음악이 시작하지 말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할 말이 없는 데 무엇인가 던져졌기 때문이다. 사티는 그것을 <건조 태아>라고 부른다. 시작할 뻔했던 어떤 것을 서둘러 끝내고 기억을 짓밟아 잊어야 한다. 베토벤 패러디는 자기 자신을 향한 아이러니이다. 기회가 닿으면 사티의 전기를 쓰고 싶다. 그의 냉소는 그의 유머보다 깊고, 그의 절망은 냉소보다 깊다. (2017년 2월 4일)


참고 - 1897



덧글

  • 2017/03/15 09:4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postludium 2017/03/15 19:23 # 답글

    반갑습니다. 준비 중이신 작업은 혹시 누델만의 저서인가요? 일전에 다른 분의 추천을 받고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책인데, 블로그에 올려주신 번역문을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책이 맞다면 더 늦기 전에 읽어봐야겠습니다.

    저도 음악을 전공하지 않아 조심스럽지만, 일반적인 경우라면 polyphonique는 다성적, contrapuntique는 대위법적으로 옮기지 않나 합니다. 대위법은 작곡 기술을 지칭하지만 다성성은 음악의 속성을 의미하므로 다성적 연주가 맞는 것 같고요. 그렇다면 다성적 연주란 작곡가의 대위법을 드러내는 연주/곡의 다성적 성격을 강조하는 연주/각 성부의 독립성과 연속성을 선명하게 들려주는 연주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블로그는 페이스북보다 생산적인 글을 써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그런 글은 안 쓰고 페이스북 스크랩만 하고 있네요ㅠㅠ
  • interplay 2017/03/15 23:02 #

    네, 누델만의 저서가 맞습니다. 번역자께 초고를 받아서 편집 중에 있는데, 속도가 더디네요 ㅠㅠ
    고맙게도 포스트루듐님께서 힌트가 아니라 거의 답을 주셨네요^^ 포스트루듐님의 의견을 수용해서 원고에 대입시켜보니 문맥이 한결 매끄러워졌어요. 고맙습니다. 큰 도움이 되었어요^^
  • postludium 2017/03/15 23:54 #

    그 책이 한국에 출간된다니 반가운 소식이네요. 노고에 감사드리며, 좋은 책이 되어 나오길 빕니다.
  • 호호 2019/05/02 02:21 # 삭제 답글

    제 개인적인 글에 이 글을 스크랩하고 싶은데요~ 괜찮을까요. 제 글을 보게될사람은 결국 8명정도 뿐입니다.
  • postludium 2019/06/12 07:56 #

    답이 너무 늦어 죄송합니다! 하셔도 좋습니다만ㅠㅠ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