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댓글에 대하여 생활

어쩐지 블로그가 댓글을 다함께 비공개로 다는 분위기가 되어가고 있네요. 최근에 논쟁적인 글을 몇 개 올린 탓도 있겠지요. 소콜로프나 JTBC에 대해서는 제가 좀 가혹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제가 비공개 댓글을 특별히 선호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피아니스트 김선욱과 해석의 문제(2): 연합뉴스의 독주회 비평에 부쳐 음악

피아니스트 김선욱씨가 며칠 전 서울에서 베토벤 소나타 8, 14, 23번을 연주했다. 이 독주회에 대한 비평가 최은규씨가 연합뉴스에 발표한 비평이 논란이 좀 되는 모양이다. 생산적인 논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한국에 살지 않으니 물론 이번 연주를 듣지 못했으며, 이 글은 당연히 최은규씨의 연주비평에 대한 반론이 아니다. 김선욱씨의 베토벤 연주에 대한 나의 가치판단을 보여주는 글도 아니다. 다만 최은규씨의 연주비평에 깔린 몇 가지 전제들을 비판적으로 짚어보고자 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김선욱은 최근 언론 인터뷰를 통해 베토벤 소나타의 표제를 배제하고 절대음악의 견지에서 작품에 접근하겠다고 선언을 했는데(이 블로그의 이전 글 참조), 최은규는 여전히 작품의 표제를 해석의 준거로 제시하는 듯하다. 김선욱의 입장이 당연히 옳으며, 쓸데없이 표제를 끌고들어온 것이 최은규의 패착이다. 표제에 의존하지 않고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였는데, 김선욱이 불과 며칠 전에 표제음악적 접근을 드러내놓고 논파한 시점에서 굳이 표제를 건드린 것은 비평가로서 실망스러운 모습이다. 김선욱은 자신이 곡의 별명에 현혹되지 않았다는 말로 간단하게 최은규의 비판을 기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절대음악과 표제음악의 대립, 전문적인 연주자와 통속적인 비평가의 대립으로 단순히 끝낼 게 아니다. 내 생각에 진짜 쟁점은 베토벤 해석에 있다.

연합뉴스 기사를 보고 뭔가 짚이는 게 있어서 아르투어 슈나벨(Artur Schnabel, 1882-1951)의 연주(14번, 8번)를 들어보았다. 최은규의 비판 중 몇 가지는 슈나벨의 연주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런데 슈나벨은 베토벤 연주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가 아닌가? 슈나벨의 연주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19세기 사람들 연주는 원래 자의적이고...하는 틀에 박힌 설명은 일단 배제하자. 최은규가 김선욱의 연주에서, 내가 슈나벨의 연주에서 주목한 문제는 다음 두 가지다. 첫째, 프레이징을 가능한 한 길고 고르게 연장하는 문제, 둘째, 소나타 형식에서 발전부 말미의 처리 문제.

1) 소나타 14번(월광) 1악장: 프레이징의 연속성

"그가 만들어낸 달빛은 지속적으로 호수를 비추지 않고 비추었다 말았다 하며 깜박이는 듯했는데, 이는 한 마디를 단위로 약간의 휴지부를 두며 프레이징(악상을 구분해 정리하는 것)을 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음악의 호흡은 매우 짧게 느껴졌고, 호수의 물결을 나타내는 듯한 8분음표의 지속적인 흐름이 뚝뚝 끊겨서 이 음악이 담고 있는 온화하고 따스한 감성을 마음껏 느끼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됐다."(기사 인용)

최은규의 주장은 요컨대 주선율 네 마디를 한 프레이즈로 연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굳이 달빛을 묘사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노래하듯 길게 연결된 프레이징이 19세기 음악의 패러다임 속에서 좋은 연주의 표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음악계에는 긴 성악적 프레이징을 절대적인 덕목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비음악적'이라는 말은 음악전공자들 사이에서 프레이즈가 뚝뚝 끊기는 것을 가리키는 은어로 쓰인다.

쇼팽 소나타 2번의 장송 행진곡에 대해 최은규와 같이 주장했다면 백번 동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길고 고르고 연속적인 프레이징이라는 이상은 클레멘티가 레가토 주법을 확립하고, 벨칸토 오페라가 건반음악의 모델이 된 18세기 후반 이후의 패러다임일 뿐이다. 바흐 시대에만 해도 없었고, 쇤베르크 이후 해체된 이상이다.

'월광' 소나타는 1801년 작품이다. 선율을 전부 길고 부드럽게 연결하는 것은 피아노 음악사에서 베토벤의 과도기적인 성격을 놓치는 것일 수도 있다. 레가토와 논 레가토의 혼재, 동기와 주제선율의 역동적인 관계, 그리고 선율적인 양식과 리듬적인 양식의 긴장, 이처럼 다양한 시대의 요소들이 완벽하게 정제된 형식 속에 통합되는 것을 지겨보는 경이, 이런 것들이 모차르트와 초기 베토벤을 듣는 재미가 아니었던가? 베토벤에게서 긴 주제선율을 하나로 잇는 연속적인 프레이징이 진짜로 중요해진 것은 한참 후기의 일이다(소나타 29번, 교향곡 9번, 현악사중주 15번의 느린악장들). 게다가 1801년에는 피아노의 울림이 오늘날처럼 긴 프레이즈를 가득 채워줄 만큼 풍부한 것도 아니었다. 만일 베토벤 시대의 악기로 최은규가 요구하는 것처럼 친다면 재미없는 음악이 될 것이다. 이 소나타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19세기적 프레이징의 이상을 무비판적으로 적용하기에 앞서, 위와 같은 음악사적인 고려가 필요했던 게 아닐까?

최은규는 "온화하고 따스한 감성"이 소나타 14번 1악장의 본질이고, 그것을 위해서 규칙적인 반주와 호흡이 긴 선율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김선욱의 연주는 이 정답을 맞추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논의의 순서가 뒤집힌 것 같다. 연속적인 프레이징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 곡이 온화하고 따스하다고 느끼는 것이 아닌가? 개인적으로 나는 이 곡이 온화하다고도 따스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으며, 그보다는 끊임없이 어두운 질문을 던지는 곡이라고 믿는다. 결국 연주를 듣지 못한 상태에서 두 사람의 글만 읽고 무모하게 짐작해 보자면, 김선욱은 베토벤을 연속적인 프레이징이라는 19세기의 패러다임에 가두는 데 도전했던 것은 아닐까?

2) 소나타 8번(비창) 1악장: 소나타 형식의 해석

최은규의 문제제기는 김선욱이 연주하는 1악장 느린 부분(Grave)의 주제가 지나치게 느리고 강조되어 있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이게 문제인 이유는 소나타 형식 특유의 균형잡힌 구도를 해치기 때문이다.

"비창의 정서를 강조하고자 하는 그의 의도는 알겠지만, 주제의 지나친 강조로 인해 소나타형식을 갖춘 1악장 주부의 구조와 발전부 말미의 클라이맥스는 전혀 부각되지 않은 채 어정쩡하게 넘어갔다. / 베토벤의 소나타 1악장에 있어 발전부 말미에서 재현부로 넘어가는 부분은 그림이나 건축에 있어 황금분할 지점과 일치할 정도로 대단한 중요성을 지니며 드라마틱한 느낌을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1악장의 소나타형식의 구조를 드러내는 데 소홀한 그의 베토벤 연주에 동의하기가 힘들었다." (기사 인용)

문제의 느린 주제는 도입부, 발전부 앞, 코다 앞에서 세 번에 걸쳐 등장한다. 중요한 지점마다 등장해서 소나타 형식의 자연스러운 전개를 끊어놓는 것이다. 말하자면 소나타 형식의 균형잡힌 구도를 뒤흔들고 있는 것은 김선욱이 아니라 베토벤 자신이 아닌가? 그렇다면 연주자의 임무 역시 통상적인 "소나타형식의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베토벤이 그 소나타 형식을 어떻게 변형시키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최은규는 1악장 주부의 구조를 문제삼고 있는데, 내 생각에는 강력한 도입부의 충격으로 주부의 안정성을 깨고, 특히 제1주제를 매우 휘발적으로 만드는 것이 이 악장의 근본적인 특성인 것 같다(소나타 26번 1악장 참조). 그리고 발전부의 말미를 과연 "클라이맥스"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또한 당연한 것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다. 슈나벨의 해석처럼, 이 부분은 폭발적으로 "부각"하는 대신 번개처럼 사라져버리게 만드는 것이 더 낫지는 않을까? 또한 이 악장에서 발전부 말미의 클라이맥스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던 것은, 다름아닌 제1주제가 곡을 쥐고 흔들만큼 강력한 안정성을 가지고 있지 못해서가 아닐까?

요컨대 베토벤은 소나타 8번에서 매우 치밀하면서도 과감하게 소나타 형식의 통상적인 구도를 흔들고 있다. 그러니 이 곡의 구조를 소나타 형식의 일반적인 특성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베토벤의 소나타 1악장에 있어..."라는 일반론으로 시작하는 최은규의 논의는 아무래도 안이한 셈이다. 소나타 악장에서 발전부 말미를 황금분할 지점에 비유하는 것은 그럴듯한 이야기지만, 베토벤의 진정한 업적은 황금분할이 아니더라도 전개에 따라 전체 구조를 완벽하게 만들 수 있는 분할의 지점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입증한 데 있다. 그의 소나타들은 하나하나가 자기만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8번 1악장의 발전부 말미가 분할의 지점으로서 어떤 성격을 가져야 할지는, 이 곡만의 구조적 특수성을 근거로 밝혀야 하지 않을까? 베토벤 연주에 대한 비평 역시 일반론적 도식을 가지고 연주를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연주자가 어떻게 자기 나름대로 완결된 구조를 만들어내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베토벤 소나타들의 구조가 다양한 만큼, 각 소나타들의 구조를 드러내는 방식 역시 다양하기 때문이다. 연주자 특유의 구조 설계를 충분히 파악한 다음에 비판을 시도하지 않으면, 연주비평은 그저 작품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슈나벨의 발전부 말미는 "클라이맥스는 전혀 부각되지 않은 채 어정쩡하게 넘어"가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집중하지 않으면 놓칠 수 있는 까마득한 심연일 수도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내가 문제삼고자 했던 것은 비평의 내용이 아니라 방법이다. 애호가들 사이에서 검증된 비평가인 최은규씨가 틀렸다거나, 듣지도 못한 김선욱씨의 연주가 옳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피상적인 대립으로 보일 수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 속에 베토벤 텍스트 해석이라는 문제가 걸려있다는 것이다. 비평가들이 더 분발해서 해석에 대한 논쟁이 풍부해지길 빈다.

텍스트 해석은 결코 지엽적이지도, 사소하지도 않다. 순간의 해석이 엇갈리는 지점에 하나의 거대한 세계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술이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자리만큼의 새로운 세계를 가지게 될 것이다. 또 우리는 그 자리를 잊어버리는 만큼 오래된 세계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피아니스트 김선욱과 해석의 문제(1): JTBC <고전적 하루>에 부쳐 음악

올해 초부터 JTBC에서 젊은 연주자들을 초대해서 이야기와 연주를 듣는다. 페이스북의 <고전적 하루> 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반가운 기획이다. (https://www.facebook.com/jtbcclassictoday/videos/370962656619631/)

9분 20초부터 김선욱이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데, 음악 외적인 이야기들로 음악을 설명하려고 하면 반드시 한계에 부닥친다는 얘기다. 작곡가의 삶에서 작곡의 배경이 되는 에피소드를 뽑아내고, 거기서 어떤 감정을 추출해내고, 그래서 음악을 그 감정에 대한 이야기로 만들어버리는 것... 음악은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여기에 대해서 피아니스트가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는, 평범한 청중들이 가질 법한 질문들에 그친 JTBC와 기자의 식견이 아쉽다.

음악이란 무엇인가, 작품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 음악 외적인 주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뿐이거나, 아니면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고 그냥 연주만 할 수 있을 뿐이라는 이분법적 편견이 있다. 이 작품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작곡가의 상실감을 표현한 것이다, 어떤 사랑 이야기를 음악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 작품을 이해했다고 하기 위해 외워두어야 할 핵심 지식은 이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정보들이 음악 자체와 좀 동떨어져 있는 것 같다면, 어쩔 수 없다, 그 간격이 음악의 신비이니, 그냥 조용히 들어라. <고전적 하루> 역시 매번 이런 이분법적 편견을 반복하고 있다.

겉도는 얘기만 하거나, 아무 얘기도 할 수 없거나. 이 양자택일은 우리의 음악 생활을 빈곤하게 만들고 있지만, 사실 전문적인 언어에 기대지 않고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고전적 하루> 역시 전혀 탓하고 싶지 않다. TV 눈높이에서 그런 얘기를 하려면 적지 않은 내공을 갖춰야 할 것이다. 하지만 김선욱에게서 그런 내공이 엿보였기에 못내 아쉽다. 그는 음악 외적인 근거, 즉 야나첵의 삶으로부터 작품의 근본 감정을 끌어내는 데 의문을 표했는데("슬픈 감정을 가지고 쳐야겠다, 그러면 슬퍼지나요?"), 여기에 대고 기자가 단숨에 "어, 아니에요, 어때요?"라고 반문하는 지점은 정말 아쉽다. 슬픈 감정을 악보 속에서 찾아야지 왜 곡 바깥의 사실에서 찾느냐는 얘기 아닌가.

김선욱이 이 지점에서 당황했다면 자기 생각이 막혀서가 아니라 기자가 성급하게 몰이해를 드러낸 탓일 것이다. 그의 말 뒤에 한 3초만 시청자가 생각할 시간을 줬더라도 뭔가 울림이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여기 편집이 개입한다. 이후 부연 설명을 좀 하고 "생각을 더 정리해서 말하겠다"고 하는데, 기자는 여기에 다시 "감정을 정형화하지 말라는 것이냐"라고 묻는다. 여전히, 감정 표현을 하고 싶으면 음악 바깥에 있는 감정을 가져와서 음악 안에 주입하거나, 아니면 감정 없이 악보대로만 치든가, 이런 양자택일이다.

여기에 대해 연주가 매 순간의 선택이라고 답하는 김선욱의 말은 동문서답인 것처럼 보이지만 기자의 의표를 정확하게 찌르고 있다. 어떻게 주변의 잡설이 아닌 음악 작품을 구현하는 과정 속에서 진짜 음악적 감정이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나중에 다시 한 번 연주를 선택의 연속으로 설명하는 것을 보면, 김선욱은 유창하게 말하지는 않아도 자신의 일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가 나중에 한 말을 끌어오면, "텍스트를 텍스트 있는 그 자체로 전달하는 것."

하지만 이 시점에서 기자는 오직 김선욱을 피아노 앞으로 보내는 데만 관심이 있다. 김선욱이 말이 막혔다->피아노 앞으로 가서 멋진 연주를 했다, 이렇게 시나리오를 짜 놓고 상황을 몰고 간 것이다. 이것은 두 번째 베토벤 연주도 마찬가지다. 김선욱이 대답을 끝까지 했다면, "새로운 월광 소나타 해석이 가능한가"라는 기자의 질문이 우문이었음이 드러났을 것이다. 해석에서 중요한 게 새로움이 아니니까. 그런데 다시 한 번 말문이 막힌 틈을 타서 기자는 김선욱을 성급히 피아노로 보낸다. 피아니스트는 월광 1악장을 치면서, 달빛에 관한 연상이 어떻게 텍스트의 해석을 그르치는지 직접 보여주면서 처음에 한던 얘기의 답에 도달한다. 오랜 신화를 가지고 예술가의 이미지를 만들어 흥행을 하려는 제작진 앞에서, 김선욱은 집념을 가지고 진실을 말한다. 음악 텍스트 자체가 아닌 것은 허울이라는 것이다.

이 인터뷰에서 김선욱이 말해줄 수도 있었던 것은 말문이 막혀서 피아노로 가는 음악가라는 통속적이고 신화적인 이미지보다 훨씬 높은 데 있다. 음악을 오직 음악으로 다루겠다는 것은 음악에 대해 대화를 할 수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전문용어들로 분석적인 이야기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온갖 지식과 환상, 알리바이, 온갖 "허울"을 걷어낼 때 우리는 음악이 어떻게 만들어져서 우리의 마음 속에 어떤 자국을 남기는지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김선욱이 꿰뚫어보고 있는 저 "허울"이 한국 클래식 음악계에 끼치고 있는 해악은 정말로 크다. 그의 식견을 다른 자리에서 언젠가 다시 들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모차르트의 느린 단조에 대해서 음악

모차르트의 단조 피아노 협주곡은 두 곡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1악장의 조성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가운데 느린 악장이 단조인 작품은 다섯 곡이다. 27곡 가운데 다섯 곡이면 모차르트에게 적은 것이 아니다. 이 작품들의 바깥 악장은 모두 장조. 어떤 슬픔은 봄날 햇빛의 투명함 속에 감추어져 있어야 한다.

...이렇게 폼만 잡고 끝냈으면 좋았을텐데 저녁때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모차르트 전집을 붙들고 다악장 기악곡 가운데 느린 악장이 단조인 곡을 세어 보았다. 전부 20곡이고 소년기에 편중되어 있다. 열한 곡은 모차르트가 8세에서 18세 사이에 작곡한 것이다. 단조 안단테는 모차르트의 독창적인 실험이기보다는 앞 세대의 흔적이었던 셈이다. 직접적인 영향은 1770년 전후 이른바 질풍노도 운동의 음악이고(<베르테르>가 출간되었을 때 모차르트는 18살이었다), 모차르트는 교향곡 25번에서 그 영향을 자기 것으로 만든 다음에야 독창적인 작곡가가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단조를 스스럼없이 쓰는 습관의 기원은 바로크에 있다. 단조가 예외적이었던 고전주의 시대, 뭔가를 강렬하게 표현해야 했던 낭만주의 시대에 비해 바로크 시대에는 단조 음악의 비율이 훨씬 높았다.

질풍노도와 바로크, 하지만 이런 것들은 젊은 모차르트가 순식간에 흡수하고 뛰어넘었던 한때의 인연일 뿐이니, 오늘 우리의 관심은 성년기의 모차르트에게 있다. 고전 소나타의 느린 악장에 완벽하게 흡수된 단조, 단순하지만 한치의 뉘앙스도 어긋나지 않는 색채, 그 위로 투명하고 가볍게 떠오르는 선율, 그것들은 사물이 거기 그렇게 가만히 있다는 사실이 너무 분명해서 자칫 숙연해지기도 하는 오후의 풍경과 같다.

단조 안단테의 모차르트는 분명 빠른 단조곡들에서처럼 빈틈없이 유창하지 않으며, 느린 장조곡들에서처럼 완벽하게 투명하지도 않다. 모차르트답게 허를 찌르는 유연함이 부족하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으며,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의 조화가 아쉽기도 하다. 모차르트를 정말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곡들을 듣고 재미가 없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당신이 모차르트를 사랑한다면...

아홉 곡의 이름을 적어둔다.

피아노 협주곡 9번 kv 271
피아노 소나타 2번 kv 280
플루트 사중주 1번 kv 285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kv 364
바이올린 소나타 25번 kv 377
바이올린 소나타 28번 kv 380
피아노 협주곡 18번 kv 456
피아노 협주곡 22번 kv 482
피아노 협주곡 23번 kv 488

아, 그리고 다악장 기악곡은 아니지만 <마술피리> 2막에서 파미나의 아리아 Ach, Ich fühl's를 빼놓아서는 안 되겠다. <라크리모사>는 안타깝지만 미완성이다.

(2017.3.13)

그리고리 소콜로프에 관하여 음악

3년 이상 소콜로프를 불편하게 생각하면서도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모르기도 했고, 주변에 그의 팬들이 많아 섣부른 비판을 삼갔는데, 그의 <디아벨리 변주곡>을 듣고 구역질이 날 뻔했다. 흥분 상태에서 몇 자 끄적였다가, 한나절 지나고 보니 소콜로프 비판을 어떤 문제의식으로 접근해야 하는지 감이 잡힌다. 음원을 전달해주신 분께는 부득이 날선 말을 쓰게 되어 송구하면서도, 언제나처럼 뭔가 깨닫는 기회를 주신 데 감사드린다. 음악에 대한 사랑은 논쟁에 열려 있다고 믿는다.

내 생각에 그리고리 소콜로프는 가짜다. 바흐와 베토벤에서 스크랴빈, 프로코피예프에 이르기까지, 그는 모든 것을 과장하며, 연출할 뿐 노래하지 않는다. 음악에는 지나가듯 표현하고 얇게 덮어두어야 할 것들이 있다. 그렇게 연주하면 초심자들은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거기에 다 현미경을 들이대서 뉘앙스를 보여준다는 명목으로 뉘앙스를 깨는 연주는 초심자를 위한 연주라고밖에 할 수 없다. 자기만의 분위기로 곡을 일관성 있게 지배하기 위해 곡이 가진 양식적 다양성을 희생하는 연주는 청자에게 자기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한 이기적인 연주라고밖에 할 수 없다. 빛나는 음색을 강조하기 위해 리듬을 깨는 연주는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일 하면서 배경음악으로 듣는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인류가 남긴 가장 지적인 음악에 어울리는 연주라 할 수 없다.

그 어떤 자기 스타일의 기조도 작곡가가 써 놓은 지시어보다 우선할 수 없다. 물론 연주자는 학자가 아니며 지적 활동으로서의 해석이 연주의 전부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기술적 완성에 충실한 장인을 존경할 수도 있고, 자기 스타일의 아우라가 확고한 나르시스트를 사랑할 수도 있다. 하지만 둘을 합쳐놓으면 예술가가 아니라 괴물이 된다. 소콜로프는 장인이면서 나르시스트다. 많은 팬들의 불쾌를 감수하고 말하는 이유는 그가 단지 내 취향에 맞지 않는 연주자가 아니라 클래식 음악의 죽음에 근접한 연주자이기 때문이며, 특이한 개성을 가진 한 명의 예술가가 아니라 클래식 소비자들 사이에서 표준적인 거장으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추가) 인문학에 익숙하신 분들은 나의 소콜로프 비판이 후기 니체의 바그너 비판을 가져온 것임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바그너의 경우>에서 말하는 것처럼 소콜로프는 데카당스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 또한 데카당스적인 인간이며, 데카당스 예술을 자주 칭송하지 않았던가? 나는 여전히 비제보다 바그너를 좋아하며, 데카당스가 그 자체로 나쁜 것이라고도, 사회에서 치워야 할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1. 하지만 소콜로프는 자신의 데카당스를 은폐한다. 늘 신사적이고 진중하며 남자 어른의 중후한 풍모를 놓지 않는다. 소노리티를 완벽하게 컨트롤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전시하는 패시지를 예로 들어보자. 이것은 반지성적인 해석이지만 지적인 연주의 외양을 하고 있다. 갑작스럽게 악보에 돋보기를 들이대는 듯한 수비토 피아노를 보자. 이것은 냉정을 찾는 듯한 제스처이지만 감각적인 짜릿함에 불과하다. 맑고 풍부한 음향으로 울려퍼지는 그의 고요함은 청자에게 작품 앞에서 깊이 명상하는 느낌을 주지만, 명상하고 있다는 기분을 즐기는 것은 명상이 아니다. 소콜로프를 사랑하는 청자들에게 이 억압된 데카당스에 대한 욕망이 있는 것은 아닌가, 조심스럽게 질문해본다. 그러나 억압과 극복은 분명히 다른 것이며, 데카당스의 감동은 자신에 대한 솔직함에 있다. 굴드가 솔직한 데카당이라면, 소콜로프는 비겁한 데카당이다.

2. 소콜로프는 자신이 데카당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로, 데카당스가 건드려서 성공할 수 없는 영역, 즉 가장 고전적인 텍스트의 해석을 건드리고 있다. 반데카당스적인 고전 작품은 최소한의 연주력만 있으면 스스로 말을 할 줄 안다. 작품이 스스로 말하는 입을 틀어막는 것이 작품의 재해석이라는 명목으로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데카당스가 통할 수 있는 영역은 정해져 있다. 소콜로프의 접근법이 성공하려면, 작품을 완전히 자기만의 개성적인 분위기로 물들일 수 있어야 한다. 바흐, 베토벤, 쇼팽의 작품이 연주자 한 사람의 손바닥에 들어갈 만큼 만만한가? 데카당스는 오직 그 작품들에 기생할 수 있을 따름이며, 이를 부인하는 것은 고전음악 해석자에게 허락된 적 없는 오만이다.

3. 솔직한 데카당이라면, 굴드의 모차르트나 쇼팽처럼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보여주고 나머지를 포기할 것이다. 굴드는 자신이 꼭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대신 전체 해석을 일종의 미완성으로 남기며, 들을 사람은 듣고 말 사람은 말라는 태도를 취한다. 소콜로프는 그렇지 않으며, 어떤 순간에든 집중을 강요한다. 작품에 관심이 있건 없건, 그의 해석에 동의를 하건 말건 그가 연주를 시작하면 일단 들어야 한다. 그는 어떻게든 주목을 끄는 장치로 곡을 시작하며, 어마어마한 힘으로 청자의 주의를 붙잡아둔다. 나처럼 그를 싫어하는 사람도 스피커에서 어쩔 수 없이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호소가 앞뒤 따질 필요 없는 매혹이 되기에 소콜로프는 또 금욕적이다.

소콜로프의 아집, 그 마력을 뛰어난 피아니스트의 연주력이라 해야 할 것인가? 드뷔시는 청자의 집중을 강요하는 음악을 두고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소리지르는 사람에 비유한 적이 있다. 또 그렇다 쳐도 그런 연주력을 예술이라고 하기 어렵다. 소콜로프의 마력은 마치 청자를 더 쉽게 작품 자체로 이끌어줄 수 있을 것 같이 보인다. 착각이다. 강요된 집중과 자발적인 집중을 구별해야 한다. 한슬리크는 수동적인 몰입 속에서 작품의 흐릿한 분위기만을 느낄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청자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들여야 하는 노력을 줄여주는 연주는 있을 수 없다.

작품 자체로 가는 지름길은 없다. 우리가 구하는 것이 오직 우리 마음을 빼앗는 분위기였다면, 오래된 고전 작품들은 필요가 없다. 소콜로프는 우리를 미학적 나태로부터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2017.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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